암호화폐는 증권이 아니다!
가상자산에 대한 규제 동향
>> 가상자산이란?
가상자산은 디지털 기반의 자산으로,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관리기관이 아니라 암호화 기술을 이용한 블록체인이라는 분산원장 기술을 바탕으로 운영됩니다. 분산원장이란 거래 내역을 기록하는 장부가 은행의 서버 컴퓨터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장부에 기록되고 동시에 그 사본이 만들어지면서 수많은 컴퓨터에 분산되어 저장되는 블록체인 기술을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컴퓨터에 기록이 암호화되고 분산 저장돼 있으므로 장부를 조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며,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 은행이나 금융 거래를 담당하는 은행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가상자산으로는 비트코인(Bitcoin), 이더리움(Ethereum), 리플(Ripple) 등이 있습니다.
가상자산은 기존의 중앙은행 발행 화폐와 달리, 전 세계 누구나 마음대로 생성 및 소유할 수 있으며, 거래 기록은 블록체인이라는 분산원장 기술을 이용하여 기록됩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거래의 건수에 따라 블록이 생성되며, 이러한 블록은 소유자 검증을 거쳐 분산원장에 저장됩니다. 사실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이 활용되는 다양한 분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가상자산을 암호화폐라고도 부르지만, 중앙은행 발행 화폐가 아니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화폐는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법적인 인정을 받고, 일부 상점에서도 결제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에 일종의 화폐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암호화폐는 가치를 보장하는 중앙 관리기관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불안정하게 변동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암호화폐는 실제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없이 투기나 투자의 대상으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암호화폐가 화폐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법적 지위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수많은 암호화폐들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난해 있었던 테라 루나 사태, FTX 거래소 파산 등과 같이 가격 폭락으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암호화폐의 급격한 가격 변동 및 불안정성과 선량한 피해자 양산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각 국가들은 이 신종 자산을 어떻게 규제할지 골머리를 앓아오고 있습니다.
>> 미국의 암호화폐 규제 : '증권거래위원회 vs 리플 사건' 판결
암호화폐 규제는 국가마다 다르며, 앞으로도 언제든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벌어지는 금융 범죄를 예방하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규제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국에서는 암호화폐 거래소를 등록하고 규제하는 법안이 발의되면서, 규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가상자산 기본법을 만들어 그동안 혼란을 겪어오던 규제를 정비해 가고 있습니다. 일본도 암호화폐 거래소 등록 등 규제 강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EU에서는 거래소의 본인인증제도(KYC, Know Your Customer) 및 자금세탁방지 (AML, Anti-Money Laundering) 강화 등으로 규제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난 2021년부터 암호화폐 관련 거래와 채굴을 금지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제들은 암호화폐 시장의 발전과 범죄 방지를 위한 것으로, 전반적으로 보면, 규제 강화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호화폐 규제와 관련하여 미국에서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SEC가 몇 년 전부터 암호화폐 발행 회사와 암호화폐 거래소를 상대로 증권법 위반 혐의로 고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20년에 고발된 리플(Ripple)인데요. 이 리플 코인은 리플랩스라는 회사가 2012년 발행한 가상자산으로, 암호화폐 거래소에는 XRP라는 종목으로 상장돼 있습니다. 암호화폐 투자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어서, 현재 전 세계 암호화폐 가운데 시가총액 5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리플은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비트코인 다음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코인이기도 합니다. SEC는 2020년 12월에 리플랩스가 증권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했습니다. 투자자들에게 XRP 코인을 판매하면서 이 코인의 가치 상승을 홍보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즉, SEC는 리플의 코인 발행 방식이 증권에 부합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2023년 7월 미국 재판부는 3년 가까이 진행돼 오던 ‘SEC 대 리플’ 사건을 판결하면서, SEC가 아닌, 리플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뉴욕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주임판사는 “리플이 기관 투자자들에게 판매될 때는 증권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증권이 아니다”라고 판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리플을 기관 투자자에게 판매할 때는 연방 증권법에 따른 투자 계약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며 “그러나 유통 시장에서, 암호화폐를 구매하는 일반 투자자에게는, 증권법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이 판결은 앞으로 암호화폐에 대한 우리 정부의 규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사건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SEC는 암호화폐를 증권법을 이용하여 규제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암호화폐가 증권으로 간주되면, 해당 암호화폐 발행자 및 거래소는 SEC에 등록하고, 기존 증권에 적용되는 규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은 증권 발행 전에, 발행하려는 증권에 대한 등록서를 SEC에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등록서에는 증권의 정보와 투자 위험성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야 합니다. 증권을 발행한 이후에는 매년 회사의 경영상황 및 재무상황, 이전 보고서와 차이점 등에 대한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SEC에 제출해야 합니다. 발행 회사는 매년 독립된 회계감사인으로부터 회계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외에도 회사는, 발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규제가 있습니다.
이 재판에서 가장 큰 쟁점은 리플이 증권인지 여부였습니다. SEC는 과거 판례로 정립된 ‘하우위 테스트(Howey Test)’를 적용해 리플랩스의 리플 판매가 투자 계약 증권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특히 투자 목적성을 검토한 결과, 리플이 유틸리티 토큰으로서 실제 어딘가에 사용됐다고 보기 어려우며, 통화에 해당하지도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우위 테스트는 1946년 ‘SEC 대 하우위’ 사건에서 최초로 적용된 기준입니다. 이 사건에서 하우위 사(社)는 토지 개발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원금, 토지 수익, 배당금, 임대료를 보장하면서, 토지를 판매하는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SEC는 이 계약을 단순히 부동산 매매 계약이 아니라, 일종의 투자 계약이므로, 양도 가능한 증권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재판에서 정립된 증권 판단 기준이 바로 ‘하우위 테스트’입니다. 하우위 테스트는 투자금, 기대 수익, 투자와 수익의 강한 연관성, 증권거래 방식에 대한 대중의 인식, 기업의 관리 및 서비스에 의한 수익이라는 기준으로 구성됩니다. 이러한 요소가 모두 충족되면, 해당 디지털 자산은 증권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투자금을 투자한 후 투자받은 기업이 그 돈을 관리하여 수익을 내며, 일반 대중의 인식에도 증권 거래로 보인다면 증권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SEC는 디지털 자산이 증권이라고 주장하며, 암호화폐 회사들에 대해 100번 이상의 시행 조치를 취해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올해 있었습니다. SEC는 미국 최대의 암호화폐 거래 플랫폼인 코인베이스(Coinbase)가 솔라나(Solana), 카르다노(Cardano), 폴리곤(Polygon)과 같은 토큰을 포함하여 최소한 13개의 암호화폐 자산을 증권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등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코인베이스 측은 이런 NEC의 주장에 대해 반발했습니다. 코인베이스를 포함한 암호화폐 관련 회사들은, 대부분의 암호화폐가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되는 데이터베이스인 블록체인에서 운영되기 때문에, 미국 법 상의 증권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SEC가 모호하고 일관성 없다며, 새로운 규제나 법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SEC의 암호화폐 관련 사건들은 많은 경우 피고 회사들은 SEC와 합의하여 벌금을 지불하고 미국 증권법을 따르거나 미국 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법원은 리플 발행사가 헤지펀드 같은 기관 투자자에게 판매한 건 자본 조달의 역할이 있어 증권성이 있지만, 일반 개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건 증권성이 없는 '상품 판매'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판결로 리플은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리플과 비슷하게, 암호화폐 공개를 통해 투자 자금을 모집해 온 코인들도, 수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번 리플에 대한 판결로, 증권법을 앞세운 SEC의 규제에는 제동이 걸리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규제 초기 단계인 가상자산은 법원 판례, 특히, 시장이 큰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금융당국이 진행 중인 가상자산 증권성 판단 기준 마련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가상자산에 설계된 사업 모델과 판매된 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가상자산의 증권성 여부는, 사법부에서 사안 별로 판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업계는 아날로그 시대에 작성된 법률을, 디지털 시대에 탄생한 자산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해 오고 있습니다.
>>암호화폐 규제와 관련한 글로벌 동향
한편, 유럽연합은 최근 암호자산 시장에 관한 법 미카(MiCA)를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세계 최초로 입법화된 ‘가상자산 기본법’입니다. MiCA는 가상자산을 ▲자산준거토큰 ▲이-머니토큰 ▲기타 토큰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차등규제를 도입했습니다. 특히, 자산준거토큰과 이-머니토큰 발행자는 충분한 유동성 준비자산을 보유하게 했습니다. MiCA는 그동안 법적 지위가 없었던 가상자산 서비스를 ‘금융성 서비스’로 봤습니다. EU 내에서 가상자산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회원국 주무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가상자산서비스제공자에게는 경영진 변경 보고 의무, 안전하게 가상자산을 보관할 의무, 서비스 기록 보관 및 고객 요청 시 제공 등의 의무가 부과됐습니다. 또한 투자자 보호를 위해 기존 금융 상품·서비스에 적용된 원칙을 가상자산 산업에 접목해, 맞춤형 규제 체계를 수립했습니다. 내부정보를 이용한 내부자거래 및 내부정보의 불법적 공개가 금지되며, 시장조작행위에 관여하거나 관여하려는 시도도 금지됩니다. 자산준거토큰, 이-머니토큰 관련 규제는, 2024년 6월 30일에 시행되고, 기타 토큰, 가상자산서비스제공자 관련 규정은 2024년 12월 30일에 시행될 예정입니다.
MiCA는 금융상품과 실물자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가상자산이 갖는 제3의 정체성을 고려한 맞춤형 규제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MiCA는 가상자산 규제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하는, 글로벌 각국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암호화폐 규제
우리나라에서도 2023년 6월 30일 가상자산시장의 이용자 보호와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을 담은 ‘가상자산 기본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이 법은 2024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가상자산 기본법은 가상자산 이용자의 자산보호, 가상자산 시장의 불공정 거래행위 규제, 가상자산 시장‧사업자에 대한 금융 당국의 감독‧제재 권한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로 지적됐던 이용자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담겨있습니다. 가상자산 사업자는, 앞으로 이용자가 예치한 가상자산을 별도로 분리해 관리해야 합니다. 또 해킹, 전산장애 등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보험에 가입하거나 준비금을 적립해야 합니다.
업계 전문가들은 코인 발행 자격 등 아직 논의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가상자산 시장은 검증되지 않은 사업자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코인이 상장되면서, 사기 등으로 인한 투자자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따라서 코인 발행자들에 대해 더 엄격하고 확실한 자격 기준이 수립되어야 할 것입니다.